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문단 편집) == 암살 실행과 실패 == 당초 거사는 1944년 7월 11일에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히틀러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폭탄을 놓고 오려고 했던 계획이 그날 [[하인리히 힘러]]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에 취소[* 검은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은 계획을 제대로 발동시키려면 히틀러와 힘러, 그리고 [[헤르만 괴링]]을 한꺼번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된다. 7월 15일에는 히틀러, 힘러, 괴링 셋 모두가 회의에 참석했고 슈타우펜베르크도 폭탄을 들고 갔으나, 시한폭탄이 작동하려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히틀러가 방 밖으로 불려 나가는 바람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러던 와중에 7월 17일 괴르델러가 체포되고, 설상가상으로 7월 18일에는 [[게슈타포]]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가 곧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 소문 때문에 게슈타포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다고 판단,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기회를 영영 놓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 7월 19일, 늑대 소굴[* "Wolfsschanze"라고 불렸다. 직역하면 늑대 소굴. 독일 육군의 작전지휘본부.]의 총통 본영에서 보충군에 다음 날 1시에 열릴 작전회의에 병력동원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보충군 참모장교를 보내라는 통보를 보낸 까닭에,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보냈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전속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Werner von Haeften) 육군 [[보병]][[중위]]가 늑대 소굴의 총통 본영에 도착하고, 검은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한 각 장성 및 장교들은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 모여 상황을 주시하며 암살기도와 동시에 그 날 오후 1시를 기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3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작전회의는 히틀러가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30분 앞당겨진 12시 30분으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작전회의는 시작되었고, 회의에 살짝 늦은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로 가던 도중 모자와 벨트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둘러대며 대기실로 들어가 가방 속의 폭탄 신관을 작동시켰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장애가 있어 경계를 덜 받았지만, 손가락이 세 개 밖에 없는 한 손만으로 급히 폭탄을 기폭시키느라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만 작동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시한 장치([[연필]]로 위장한 것)도 [[펜치]]로 캡슐을 짓눌러서 약품을 혼합시키는 화학식이라 매우 번거로웠기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간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곳에 폭탄이 든 자신의 서류가방을 두고서 베를린에서 급하게 올 전화가 있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72-025-10%2C_Hitler-Attentat%2C_20._Juli_1944.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72-025-12%2C_Zerst%C3%B6rte_Lagerbaracke_nach_dem_20._Juli_1944.jpg]] 당시의 사건현장. 12시 42분, 육군 참모총장인 육군대장 아돌프 호이징어(Adolf Bruno Heinrich Ernst Heusinger) 장군이 [[독소전쟁|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중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 않으면, 파국이..."라는 말과 동시에 폭탄이 폭발했다. 당시 히틀러는 육중한 참나무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서 지도상의 항공 정찰 위치를 살피고 있었던 때였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으며 유리 파편 나무 조각 종이와 잡동사니가 사방으로 튀었다. 폭발이 일어났을 당시에 회의실에는 24명이 있었는데, [[속기사]] 두 명 중 한 명인 하인츠 베르거가 즉사했고, 2명이 사건 하루~이틀 뒤, 1명이 부상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2개월 뒤 사망해 총 4명이 사망했다. 20명의 부상자들 중 몇명은 폭발의 충격으로 멀리 날아갔고, 대부분이 머리와 옷에 불이 붙거나 뇌진탕으로 쓰러지고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입었다. 히틀러 본인도 폭발로 인해 팔에 나무조각이 박히고 고막 파열과 약간의 다리 화상을 입었다. 다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였기에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뒤 그냥 바지에 붙은 불길을 탁탁 두드려 끄고 불에 그은 뒷머리를 털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한편 폭발이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던 [[빌헬름 카이텔]]도 폭발을 피해 나가려던 도중 문에서 히틀러를 보자 "살아계셨군요, 살아계셨군요"라고 반가워하며 거동이 불편한 히틀러를 부축하여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곧이어 총통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황급히 뛰어왔고, 그의 시종인 링게가 혼비백산하여 뛰어오자 히틀러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누가 나를 죽이려 했네, 링게"라고 말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afik_-_Lagebesprechung_Wolfsschanze%2C_20._Juli_1944.png]] 폭탄 폭발 직전, 회의실의 인원 위치 표시다. 해당 인원들은 번호별로 다음과 같다. * 1번: 총통 아돌프 히틀러 - 경상 * 2번: 육군중장 아돌프 호이징어(Adolf Heusinger) - 경상 * 3번: 공군중장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 - 중상(重傷), 사건 이틀 뒤 사망 * 4번: 육군대령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 중상(重傷), 현장에서 다리 1개 절단, 사건 하루 뒤 사망 * 5번: 공군비행대장 카를 보덴샤츠(Karl Bodenschatz) - 중상(重傷) * 6번: 육군중위 하인츠 베이체네거(Heinz Waizenegger) - 중상(中傷) * 7번: 육군보병대장 루돌프 슈문트(Rudolf Schmundt) - 중상(重傷), 합병증으로 1944년 10월 1일 사망 * 8번: 육군중령 하인리히 보르크만(Heinrich Borgmann) - 중상(重傷) * 9번: 육군보병대장 발터 부흘레(Walther Buhle) - 중상(中傷) * 10번: 해군소장 카를-예스코 폰 푸트카머(Karl-Jesko von Puttkamer) - 중상(中傷) * 11번: [[속기사]] 하인츠 베르거(Heinz Berger) - 즉사, 현장에서 다리 2개 절단 * 12번: 해군대령 하인츠 악스만(Heinz Assmann) - 중상(中傷) * 13번: 육군소령 에른스트 욘 폰 프레젠트(Ernst John von Freyend) - 중상(中傷) * 14번: 육군소장 발터 쉐르프(Walter Scherff) - 중상(重傷) * 15번: 해군소장 한스-에리히 포스(Hans-Erich Voss) - 경상 * 16번: SS소령 오토 귄셰(Otto Günsche) - 경상 * 17번: 공군대령 니콜라우스 폰 벨로프(Nicolaus von Below) - 중상(中傷) * 18번: SS중장 [[헤르만 페겔라인]](Hermann Fegelein) - 중상(中傷) * 19번: 속기사 하인츠 부슈홀츠(Heinz Buchholz) - 중상(中傷) * 20번: 공군소령 헤르베르트 뷔슈(Herbert Büchs) - 중상(中傷) * 21번: [[외무부]] 연락관 프란츠 에들러 폰 손라이트너(Franz Edler von Sonnleithner) - 중상(中傷) * 22번: 육군포병대장 발터 발리몬트(Walter Warlimont) - 경상 * 23번: 육군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Alfred Jodl) - 경상 * 24번: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 - 경상 암살이 실패한 이유로는 폭약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Mythbusters|미국의 호기심 해결사 프로]]에서 증명해 냈다. 벙커 안에서 같은 양의 같은 폭약을 사용해도 치사량만큼의 폭압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이 든 가방을 아쉬운 대로 폭사시키기 좋은 위치에 놓고 간 뒤 호이징어 장군의 전속부관인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방에 걸려 넘어질 것을 우려해 히틀러 가까이에 놓인 폭탄 가방의 위치를 테이블 다리 너머로 바꾸면서 결국 두꺼운 목재로 된 회의장의 테이블 다리가 히틀러의 방패가 된 탓이었다. 가방을 옮긴 브란트 대령은 그 가방의 위치 덕에 자신도 사망자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브란트 대령의 상태를 생각하면, 가방의 위치만 그대로였어도, 히틀러를 즉사시킬 수는 없어도 얼마 뒤 사망케 할 수준의 부상은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원래 회의장이었던 밀폐된 콘크리트 벙커가 아니라 창문 등이 있어 환기가 가능한 일반 건물인 것도 원인이었다. 이는 거사 당일이 한여름이라 [[콘크리트]] [[벙커]] 내부 온도가 더웠기 때문에 일반 건물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가 폭약을 소량만 가지고 간 것도 바로 사람 폭사시키기 좋은 벙커에서 진행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예정대로 벙커에서 폭발했다면은 적은 폭발력이라도 튼튼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구조물의 손상을 최대한 줄이고 자연스레 폭풍과 폭압이 여기저기 부딪히며 배로 강해지지만 환기 잘 되는 일반 건물이면 폭풍과 폭압이 창문 등으로 새어나가고, 회의실이 있던 내구성 약한 목조 건물같은 경우는 구조물도 함께 날라가 폭발력이 분산되는걸로만 끝나고 자연스레 위력이 약해진 것이다. 만약 벙커에서 회의했었다면 테이블 다리쪽에 가방을 놔뒀어도 강한 폭발력 때문에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폭약의 양이 폭압만으로 즉사시키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대령 본인도 알고 있었고 그는 대신 폭발력의 증대가 강한 콘크리트 벙커를 믿었으나 예상 외의 변수를 만났고 그 결과는 암살 실패었다. 그나마 가방이 제 위치에서 터졌으면 폭탄 바로 앞에 있다 사망한 브란트 대령의 상태로 보아 총통을 죽일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브란트 대령이 위치를 바꿔 버리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암살의 성공을 확신하며 늑대 소굴을 떠난 사이,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 모여있던 장성들은 오후 1시 15분, 총통 본영의 통신부대 사령관이었던 육군 통신대장[* General der Nachrichtentruppe. 당시 독일 육군의 경우, 특이하게 장군 계급 중 대장 계급에만 출신 병과 이름을 정식으로 붙였다. 독일 육군에서 통신 병과로 대장 계급을 받은 장교는 펠기벨, 알베르트 프라운 두 장군뿐이다. 프라운 장군은 대전 초기 육군[[상급대장]]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밑에서 통신 지휘관으로 활약하면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에리히 펠기벨]](Fritz Erich Fellgiebel) 장군의 연락으로 히틀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도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소련]]이 저공비행으로 폭탄을 투하했거나 이미 오래 전에 연합군 [[간첩|스파이]]가 폭탄을 미리 설치해두고 나중에 터뜨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하 장교들에 의해 슈타우펜베르크의 여러 수상한 행동들이 보고되자 히틀러는 슈타우펜베르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펠기벨 장군이 13시경에 늑대 소굴의 통신선을 몰래 절단했기 때문에 이 곳은 연락두절로 고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